'코리언 스나이퍼' 왕정훈, '한국의 우즈' 될 수 있을까?
01.30 18:28

“타이거 우즈와 붙어 보고 싶다.”
올해를 앞두고 왕정훈(22)이 던진 출사표였다. 왕정훈은 지난 29일 커머셜뱅크 카타르 오픈 우승으로 올해 마스터스에서 ‘골프 황제’ 우즈와 함께 경쟁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 이번 우승으로 세계랭킹 39위로 뛰어 오른 왕정훈은 시즌 첫 메이저인 마스터스 티켓을 사실상 확정했다.
유러피언투어 29개 대회 출전 만에 3승을 챙긴 왕정훈은 1999년 우즈(12개 대회) 이후 3승을 가장 빠른 페이스로 달성했다. 또 양용은과 함께 한국 선수 유럽 투어 최다승 타이 기록을 이루기도 했다. 순수 유럽 투어만 따지면 왕정훈이 3승으로 가장 많다. 양용은의 3승에는 메이저인 PGA 챔피언십이 포함됐다. 또 왕정훈은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중동 대회에서 우승하는 영광도 안았다.
3승을 달성한 21세144일 어린 나이도 화제를 모았다. 일단 20회째를 맞은 카타르 마스터스의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남겼다. 또 마테오 마나세로(19세206일·이탈리아), 세베 바예스테로스(20세77일·스페인)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어린 나이에 유러피언투어 3승을 거뒀다. 이미 왕정훈은 지난해 핫산 2세 트로피와 모리셔스 오픈을 차례로 제패하며 20세263일이라는 최연소 유러피언투어 2연승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외도 왕정훈은 최연소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16세 어린 나이로 프로 무대에 뛰어든 그는 2012년 중국프로골프(CPGA) 퀄리파잉(Q)스쿨 최연소 통과 기록을 세웠다. 또 그해 CPGA 최연소 상금왕에 오르기도 했다. CPGA는 PGA투어 차이나가 창설되기 전의 중국 1부 투어다. 2013년 왕정훈은 17세4개월의 최연소 나이로 아시안투어 Q스쿨을 통과하기도 했다.
걸어온 길과 환경이 서로 다르지만 왕정훈과 우즈는 주니어 시절부터 각종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며 ‘골프 천재’로 각광 받았다는 공통 분모가 있다.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객관적인 평가에서 우즈가 한참 앞서가고 있다. 우즈는 1994년 아마추어 최고 권위의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18세7개월 당시 최연소 나이로 우승하며 주목을 끌었다.
또 우즈는 1997년 마스터스에서 21세3개월14일이라는 대회 최연소 우승을 기록하며 수퍼스타로 발돋움했다. 당시 우즈는 대회 역대 최소타(18언더파)와 최다 타수 차(12타) 기록으로 정상에 올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5년 9월7일생인 왕정훈은 “마스터스 우승이 올해 목표”라고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만약 왕정훈이 올해 마스터스에 출전해 우승을 한다하더라도 우즈의 최연소 마스터스 우승 기록은 경신할 순 없다. 왕정훈이 우승한다면 21세7개월2일의 나이가 되고 이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마스터스 우승으로 기록될 것이다.
21세 우즈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우즈’로 거론될 수 있는 후보는 왕정훈과 김시우 정도다. 김시우는 2012년 역대 최연소(17세5개월6일) 미국프로골프협회(PGA)투어 Q스쿨 합격 기록을 세웠다. 또 지난해 윈덤 챔피언십에서 한국 선수 최연소(21세2개월) PGA투어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왕정훈과 김시우는 동갑내기로 주니어 시절부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비록 무대는 다르지만 둘은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의 대표 얼굴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고 있다. 왕정훈과 김시우는 어린 나이지만 두둑한 배짱과 침착함이 강점이다. 300야드가 넘는 호쾌한 장타에 빼어난 클러치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카타르 마스터스 같은 경우 왕정훈의 파워와 승부 근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연장전에서 무조건 버디만 생각하고 260야드 이상 남은 거리에서 2번 아이언으로 핀을 보고 바로 쏘며 승부수를 띄웠다. 세컨드 샷을 한 후 'Go'라고 외치며 볼을 주시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결국 이런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는 우승의 발판을 놓았다. 챔피언 퍼트 성공 후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며 포효하는 모습도 우즈를 연상케 했다.
세계랭킹에서는 39위 왕정훈이 58위 김시우에 앞서 있다. 둘은 생애 처음으로 오는 4월 나란히 마스터스에 출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우즈’를 꿈꾸는 왕정훈과 김시우가 복귀전을 치른 우즈와 만나게 될 첫 번째 무대가 될 전망이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살아남은 근성도 비슷하다. 둘은 아시아와 미국에서 버티고 살아남았다. 세계 최고의 무대 진출을 위해 PGA 웹닷컴(2부 투어)을 전전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시우의 과정도 눈물겹고 대단하다. 하지만 잡초 근성은 왕정훈을 따라올 수 없다. 왕정훈은 한국 주니어 무대에서 ‘따돌림’을 받았고, 골프유학을 했던 필리핀에서도 대회를 싹쓸이한다는 이유로 추방 비슷하게 당했다. 뛸 곳이 없어 ‘아시아의 떠돌이’가 됐던 왕정훈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무대가 나이 제한이 없었던 중국의 CPGA였다.
'골프 노마드' 왕정훈의 근성은 온실 속에서 꿈을 키워온 다른 선수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또 성인이 된 2014년부터 아버지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스케줄을 관리하며 아시아를 돌고 돌았던 왕정훈이다. 어린 나이에도 내공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정훈의 아버지 왕영조 씨는 “아들이 그 동안 타지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잘 헤쳐 나갔다”며 “아무래도 강한 내면이 아들의 최대 강점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혼자 군장을 짊어지고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왕정훈에게 ‘코리언 스나이퍼’라는 훈장도 붙었다. 동료들은 왕정훈이 필드에서 남다른 기운을 뿜어낸다고 입을 모은다. 특별한 사연과 남다른 승부근성이 왕정훈을 더욱 빛나게 한다. 또 왕정훈은 유럽 선수에 비해 몸집이 왜소하고 파워가 떨어진다는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등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편이다.
핫산 2세 트로피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주먹을 불끈 쥔 왕정훈.
지난해 첫 우승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왕정훈은 모두의 만류에도 모로코행 비행기를 탔다. 대기 순번 3번이어서 유러피언투어 핫산 2세 트로피 대회의 출전이 보장되지 않았지만 그는 20시간이 넘는 고된 비행길을 택했다. ‘도전하지 않으면 기회도 없다’는 자신의 신조대로 행동했고, 결국 기회를 잡았다. 다른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으면서 대회를 뛰게 된 그는 18번 홀에서 3연속 버디를 낚아 연장 끝에 정상에 올랐다. 연장 첫 홀에서 패색이 짙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10m 거리의 버디 퍼트를 우겨넣어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카타르 마스터스에서도 왕정훈은 남다른 사연을 안고 멋진 승부를 보여줬다. 지난 13일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우승컵을 받치기 위해 남몰래 이를 악다물었다. 태국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중 병원에 입원해있던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했던 왕정훈은 맏손자였기 때문에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귀국하려 했다.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병세가 위독했던 할아버지를 뵙긴 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 전훈지서 생활했던 아버지의 만류로 눈물을 머금고 예정대로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과 카타르 마스터스 대회에 연속 출전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타국에서 할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던 왕정훈. 카타르 마스터스 우승컵을 할아버지 영전에 받칠 수 있게 된 왕정훈은 조금이나마 무거운 마음을 덜어낼 수 있었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