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아시아 대표로 선발된 '희귀종' 왕정훈
12.28 08:57

떠오르는 신예 장타자 왕정훈(20)은 희귀종이다. 한국 주니어 골프 선수들의 피 말리는 경쟁구도가 싫어 중학교 시절부터 필리핀으로 떠났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그는 세계 각지를 돌며 경험을 쌓고 기량을 닦았다. 2012년 만 16세의 어린 나이로 프로 전향한 그는 2012년 중국프로골프(CPGA) 투어 퀄리파잉(Q) 스쿨을 최연소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해 CPGA 상금왕에 올랐다. 2013년에는 아시안투어 Q스쿨을 뚫었다.
아시아를 주무대로 삼았던 왕정훈은 한국과 유럽 무대 등을 오가며 경쟁력을 키웠다. ‘골프 노마드(유목민)’를 자처하며 자유롭게 세계를 떠돌았던 그는 아시안투어 세 시즌 만에 큰 결실을 맺었다. 내년 1월15일부터 사흘간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유라시아컵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발된 것. 또 2016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풀시드도 확보했다. 공부로 따지면 검정고시 패스 후 해외의 유명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m80cm의 건장한 체격 조건을 지닌 왕정훈은 주니어 시절부터 될 성 부른 떡잎으로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Q스쿨을 최연소로 통과했던 김시우와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한국을 떠났기에 국가대표 주니어 상비군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왕정훈은 “8년 전 초등학교 때 일본에서 열린 한중일 대항전에 출전했던 게 한국을 대표해서 나갔던 유일한 국제대회였다. 이번에 생각도 못했던 아시아 대표로 선발돼서 너무 기분이 좋고 의미가 남다르다”고 털어놓았다.
유럽과 아시아의 대륙대항전인 유라시아컵 대표 24명 중 왕정훈은 최연소 출전 선수다. 올해 아시안투어 상금랭킹 9위를 차지한 그는 아시아팀의 캡틴 지브 밀카 싱(인도)이 추천 선수로 선발했다. 상금랭킹이나 169위의 세계랭킹을 고려해도 충분히 선발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 안병훈(28위)과 김경태(60위)도 이번 유라시아컵 대표로 뽑혔다. 아시아 대표 선수로 꼽히는 통차이 자이디, 키라덱 아피반랏(이상 태국), 아니르반 라히리(인도) 등도 포진됐다. 유럽도 캡틴 대런 클라크(북아일랜드)를 비롯해 대니 윌렛, 리 웨스트우드, 이안 폴터(이상 잉글랜드), 빅토르 드뷔숑(프랑스) 등 정예 멤버 12명이 출전한다.
왕정훈은 아직 아시안투어에서 우승컵이 없다. 올해는 톱10에 3차례 들었고 22만 달러를 벌었다. 특히 KPGA 코리안투어는 상위 세계랭킹 자격으로 3번 출전해 SK텔레콤 오픈과 한국 오픈에서 3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표를 받았다. 상금 1억1054만원으로 상금랭킹 17위에 올라 당당히 내년 시즌 풀시드를 확보했다.
그는 “궁합이 잘 맞는 코스에서 경기를 했고, 컨디션과 퍼트감이 좋아 결과도 좋았다. 한국 시드는 아시안투어에서 고생한 보답이라 생각하고 내년에는 한국 무대에 더 많이 출전할 것”이라고 기뻐했다. 2012년부터 2년간 캐디백을 메고 아시아를 돌았던 왕정훈의 아버지도 “아들이 그 동안 타지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잘 헤쳐 나갔다. 부모로서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왕정훈은 2014년부터 혼자서 세계 각지를 돌며 자립심을 길렀다.
300야드 이상의 드라이브 샷이 강점이다. 호쾌한 장타를 바탕으로 왕정훈은 아시안투어 이글 부문 1위(7개)를 차지하기도 했다. 드라이브샷 평균 300.44야드로 8위인 그는 “많이 나갈 때 320야드까지 보낸다”며 거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또 100야드 이내의 웨지 샷에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특별한 롤모델은 없지만 쇼트 게임을 잘하고 창의적인 샷을 구사하는 필 미켈슨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세계 톱랭커들과 함께 경기를 하는 유라시아컵에 대한 기대가 크다. 왕정훈은 “유럽 대회에 종종 출전했지만 상위 랭커와 직접 맞붙은 적은 없다. 퍼트가 좋은 대니 윌렛과 꼭 붙어보고 싶다. 리 웨스트우드와도 기회가 되면 대결하고 싶다”고 했다.
왕정훈은 세계 톱랭커와 경쟁하는 첫 메이저 대회라는 마음가짐으로 유라시아컵을 준비할 계획이다. 1월1일 필리핀으로 건너가 일주일 정도 샷감을 끌어올린 뒤 결전지 말레이시아로 건너갈 전망이다. 그는 “부담을 갖지 않고 평소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원래 연습할 때 무리하지 않고 쇼트게임에 집중하고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