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귀환, 카운트다운 쇼타임
11.03 17:17

김대현은 요즘 밝아지고 맑아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고양이 눈이라 날카로워 보였는데 최근에는 인상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오랜 인내 끝에 찾아온 우승컵과 투어 9년의 관록이 묻어나면서 눈매도 깊어졌다.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너그러움이 채워지자 진정한 왕의 얼굴이 드러나는 듯하다. 여유와 자신감을 되찾은 김대현은 이제 그 어떤 도전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왕의 두 번째 눈물
지난 9월 6일 대전 유성 골프장. 한 남자의 눈물이 그린을 적셨다. 2012년 먼싱웨어 매치플레이 챔피언십 우승 후 4승을 하기까지 정확히 1079일이 걸렸다. 챔피언 퍼트를 마치고 역전승을 일궈낸 김대현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다 이겼구나 생각이 들었고, 3년간 마음고생 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079일이라는 숫자가 마음을 더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라고 털어놓았다.
2010년 KPGA 코리안투어 상금왕을 차지했던 김대현은 매일유업오픈에서 정말 킹다운 신들린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는 3라운드 파4 4번 홀에서 아웃오브바운즈(OB)를 두 차례나 했고, 쿼드러플 보기를 했다. 3라운드에서 양파를 하고도 김대현은 21언더파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1언더파는 본인의 최다 언더파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OB를 2개나 하고도 우승했냐고 ‘미쳤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OB가 없었더라면 25, 26언더파도 가능했다”고 기분 좋게 말했다. KPGA 코리안투어의 최다 언더파 기록은 올해 장동규가 KPGA선수권에서 적은 24언더파다.
김대현은 쿼드러플 보기는 자신의 실수라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한 템포를 쉬고 갔어야 했는데 바로 티샷을 쳤던 게 화근이었다. 9월 신한동해오픈 2라운드에서는 섹스튜플 보기를 적기도 했다. 파5 14번 홀에서 9온 2퍼트로 11타 만에 홀아웃했다. 그는 “정신이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스코어는 기준 타수에 7타나 더 많이 친 셉튜플 보기다. 그는 “2010년 솔모로 오픈에서 파5 홀에서 OB 4개를 한 끝에 12타를 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화가 나서 티박스에서 계속 티샷을 고집했다. 결국 대회도 기권했다”고 고백했다.
첫 번째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더듬었다. 프로 데뷔 첫 우승 때였다. 첫 우승을 하기 전까지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김대현은 2008년 두 번의 연장전에서 모두 패하며 첫 우승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공교롭게 장소도 같았다. 9월 한중투어 KEB인비테이셔널 2차 대회에서 김대섭에게 패했고, 11월 하나투어 챔피언십에서는 최호성에게 무릎을 꿇은 바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아픈 추억의 장소였던 웰리힐리 골프장(전 오스타 골프장)에서 악연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3번의 도전 끝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는 “2008년에 두 차례나 같은 장소에서 연장전 끝에 지고 나니 어리둥절했다. ‘전생에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며 “당시에도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게 지난 3년간 우승이 없었을 때와 비슷했다. 독기를 품었고 딱 그 장소에서 우승을 했다”라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빨 드러낸 호랑이
김대현은 축하 우승 문자를 400통 넘게 받았다. 행복한 마음으로 지인들에게 답장을 일일이 보내줬다고 한다. ‘언젠가는 올라올 줄 알았다’는 축하 인사를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김대현은 “3년간 이빨을 숨기고 있다가 드러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는 “이번 우승을 발판으로 앞으로 더 뻗어나갈 탄탄대로의 길을 닦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호랑이는 지난 3년간 동굴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이제 김대현은 끝났어’, ‘3년이나 지났는데 부활하는 게 힘들다고 봐야지’라는 냉정한 평가 속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김대현은 “안 좋은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런 악평을 들으면서도 골프를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은퇴까지는 아니지만 골프 클럽을 놓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12번은 넘게 들었던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절치부심의 슬럼프 기간 동안 김대현의 가슴에 두 단어가 새겨졌다. 절실함과 인내. 맹수를 다시 동굴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힘이었다. 한 번 왕좌에 올랐던 선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초심을 돌아가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1, 2년은 괜찮았다. 하지만 3년째가 되자 정말 힘들어졌다. 너무 답답했다. 예전의 좋았던 기억을 되살려서 하면 되는데 어깨 부상까지 겹치는 등 몸도 안 따라줬다”고 설명했다.
김대현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2010년 상금왕을 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기억도 지웠다. 루키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돌아갔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흔한 레퍼토리지만 실현하고 이겨내기가 힘들다. 김대현은 “안 좋은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 것도 있고, 내성도 생기더라. 그럼에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18홀을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18홀 라운드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매 홀을 1번 홀이라고 마음먹고 티 박스에 선다. 그는 “항상 1번 홀의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니 흔들리지 않았고, 마인드도 단단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3년 만의 우승에도 축하파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승리에 도취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이다. 그는 “우승 축하연 같은 것을 하지도 않았다. 발판을 마련했으니 하루라도 더 연습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우승 후에도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게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며 변화된 자신에 놀라기도 했다.
매일유업오픈에서 다정히 우승 뽀뽀 세리머니를 펼쳐 관심을 모았던 여자친구의 한 마디도 김대현을 깨웠다. 지난해 7월 지인의 소개로 만나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 여친은 “더 죽도록 해라”는 우승 ‘덕담’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남친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일반인임에도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여친이지만 독한 김대현보다 더 독한 구석이 있었다. 부모님보다 더 내조를 잘하고 있는 여친 덕분에 김대현은 심적인 안정감을 찾았고, 결국 부활을 노래할 수 있었다.
#250km 드라이빙, 267km 볼 스피드
2007년부터 5년 연속 장타왕을 차지했고, 평균 드라이브 샷 300야드 시대를 열었던 김대현이 장타가 아닌 정교함으로 승부한다고 하자 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몸을 혹사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장타를 날릴 수 없다’와 ‘시간을 역행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의견으로 갈렸다. 거리가 줄어든 김대현에게 따라올 수 있는 당연한 평가였다.
김대현은 반박했다. 장타 대신 정교함으로 무장한 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살리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어깨 부상 등으로 몸이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두 가지 다 살리려 한다면 이도저도 안 될 거라는 판단이 섰던 김대현이었다. 결국 스윙을 간결하게 줄이고 정확성에 중점을 둔 김대현은 우승이라는 결과물로 부정적인 시선을 지웠다.
바뀐 스윙이 자리 잡으면 다시 장타를 장착할 계획이다. 그는 “조금 낮췄을 뿐이지 얼마든지 다시 높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내년에는 예전처럼 다시 돌아가 호쾌한 장타를 보여주겠다”라며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노하우도 생겼다”라고 자신했다. 여기에 코스 매니지먼트 등의 노련미까지 가미된다면 그 파괴력은 예전보다 더 커질 수 있다.
김대현은 올해 자신에게 80점을 줬다. 긴 세월 동안 잘 참아냈고, 우승으로 김대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다. 또 끈질기게 괴롭혔던 어깨도 말끔히 나았다. 신한동해오픈에서 트랙맨으로 측정한 결과를 보면 김대현의 볼 스피드는 166.1마일(267km)에 달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평균 165마일보다 높은 수치다. 또 김대현의 스윙 스피드도 113.2마일(182km)로 PGA 투어 평균 112마일보다 높았다. 스윙을 간결하게 바꿨음에도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의 스윙을 하고 있다는 게 수치로 나타났다.
필드 밖에서도 김대현은 스피드를 즐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가 카 드라이빙이다. 고속도로에서 250km까지 밟아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모터쇼 관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스티커 같은 것을 사서 차를 아기자기하게 꾸미기도 한다. 가끔 레이싱 동호회에 나가고 레이스를 관전하는 것도 즐긴다”라고 말했다. 안전에 대한 카 튜닝이라면 돈을 아끼지도 않는다고 한다.
날쌔고 빠른 레이싱카와 김대현의 이미지는 잘 맞아 떨어진다. 힙합 배틀 오디션 프로그램인 'Show me the Money'에서 빠른 속사포 랩을 구사하는 힙합 전사의 이미지도 나쁘진 않았다(사진 촬영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스냅백 모자를 쓰고 펑퍼짐한 힙합 의상을 입어 너무 어색했다고 한다. 클럽에 마지막으로 간 게 5년이 넘었지만 최근 가장 핫한 강남 클럽의 이름쯤은 알고 있는 센스를 갖고 있었다). 김대현은 자신의 인생을 비트와 리듬에 실어 노래하라고 한다면 래퍼들처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제 1막이 ‘드라이버 쇼(Driver Show)’였다면 이제 새로운 버전의 제 2막은 어떤 쇼로 전개될지 무척 기대된다.
김대현은 5일부터 충남 태안 현대 더링스 골프장에서 열리는 2015 KPGA 코리안투어 최종전인 카이도골프 LIS 투어 챔피언십에서 화려한 피날레를 꿈꾸고 있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