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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위해 피자 굽고 레슨 뛰는 한국 남자 골퍼들

09.15 08:48

경기도 분당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보나쿠치나를 운영하는 프로골퍼 배규태. 평소에는 식당 일에 매달리다 대회 때만 골프를 하는 투잡형 골퍼다. [사진 배규태]

#1.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코리안투어 1부 시드를 가진 배규태(32)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대회 기간에만 골프를 하고 보통 때는 식당일에 온종일 매달려 있다. 남자 골프 대회가 줄어 요식업이 본업, 프로 골퍼는 부업이 된지 오래다. 전문 셰프는 아니지만 바쁠 땐 피자와 파스타 정도는 뚝딱 만들어낸다. 이른바 ‘투잡형’ 선수다.

#2. 2006년 제대한 프로골퍼 A는 전역 후 투어와 레슨을 병행해야 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레슨으로 투어 비용을 벌어야 했고, 결혼 후 아이까지 태어나자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레슨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중견 골퍼 B도 대회 수가 줄어 생계가 힘들어지자 올해부터 레슨을 시작했다. A, B선수는 ‘생계형’이다.

#3. 코리안 투어에서 역사가 가장 긴 KPGA선수권은 선수들에게도 외면받았다. KPGA선수권은 회원인 프로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출전하는 메이저 대회지만 김경태(29·신한금융그룹)와 이경훈(24·CJ오쇼핑) 뿐만 아니라 문경준(33·휴셈)·박상현(32·메리츠금융)까지 불참했다. 한국의 메이저 대신 일본프로골프투어(JGTO)의 일반 대회를 택했다. 주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이들은 ‘탈출형’으로 분류할 만 하다.

2015년 한국 남자 프로골퍼들의 고달픈 현주소다. KPGA투어의 올해 대회는 총 12개. 그나마 하위 랭커들은 아시안투어와 겸하는 대회엔 출전할 수 없다. 총상금 84억원의 KPGA투어는 올해 29개 대회 총상금 184억원으로 커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의 절반도 안 되는 규모다. 남자 골퍼들은 한 해 5000만원 이상 드는 투어 비용을 감당하려면 상금랭킹 50위 안에 들어야 한다. 생활비까지 벌려면 25위 안의 톱랭커가 돼야 한다. 대다수가 생활고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내 남자와 여자골프의 빈부 격차는 스폰서 계약에서도 드러난다. 여자 골프는 1부 투어 카드만 있으면 대부분 후원사를 찾을 수 있다. 굳이 레슨을 할 필요가 없고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하지만 남자 골프는 지난해 상금왕 김승혁(29)조차 메인 스폰서를 찾지 못했다.

골퍼가 직업인 프로들은 직장의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자 각자 살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배규태처럼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프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배규태는 “2011년 형이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형의 일을 돕다가 지금은 아예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점에서만 월 3000만~5000만원의 매출이 나오고, 5개의 프랜차이즈 가맹점도 생겼다.

그러나 ‘헝그리 골퍼’들은 안정된 수입 확보를 위해 레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상금을 벌기 위해 스크린 골프대회에 출전하기도 한다. KPGA투어의 김민석(36)과 김민호(26)는 필드와 스크린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다. 프로골퍼들 사이에선 "1부 투어보다 2·3부 투어에서 뛰는 프로들이 낫다"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온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2·3부 투어 프로들이 뛸 수 있는 대회는 대략 30개 정도다.

남자 골프에도 ‘봄날’은 있었다. 2006~2008년엔 해마다 18~20개의 대회가 열렸고 인기도 좋았다. 하지만 KPGA 내부의 파벌 싸움과 일부 프로골퍼들의 고압적인 자세 탓에 팬들은 멀어져 갔다.

지금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프로암 참가자들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티오프 전에 준비한 사인볼과 모자 등을 나눠주며 팬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10승을 거둔 베테랑 김대섭(34·우리투자증권)은 “저부터 웃으면서 팬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투어가 축소돼 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해 어색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아직 팬들과의 호흡도 서툴다. 매일유업오픈에서 우승한 김대현(27·캘러웨이)은 “팬들과의 소통에 쑥스러워 하는 선수들이 많다. 선수회에서도 개선 방향 등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 골프의 중흥을 위해선 스타도 필요하다. 이수민과 이창우(이상 22·CJ오쇼핑)는 “우리가 잘 하고 달라진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는 게 최우선” 이라고 입을 모았다.

'헝그리 골퍼'들이 피자를 굽고 레슨 등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1부 투어 우승이라는 꿈 때문이다. 이들은 꿈이 있기 때문에 고된 이중생활도 꿋꿋이 버텨 나가고 있다. 배규태는 "1부 투어 우승하고 정상에 섰을 때 멋지게 은퇴하고 싶다"고 말했다. 꿈을 안고 사는 이들은 17일부터 인천 베어즈 베스트 청라 골프장에서 열리는 신한동해오픈에서 우승을 꿈꾼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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