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선수 조심해라'는 속설과 박인비
08.04 08:19
스포츠계에는 ‘아픈 선수를 조심해라’는 속설이 있다. 어떻게 보면 골프 종목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메이저 퀸’ 박인비는 부상을 안은 채로 두 번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해야 했다. ‘부상 투혼’을 발휘한 박인비는 두 대회 모두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커리어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해 감동이 배가 됐다. 양보 없는 승부의 세계에서 역경을 딛고 승리하는 장면은 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또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도 심어주는 등 진정한 스포츠의 의미를 실현한 순간이기도 했다.
멘털 스포츠로 분류할 수 있는 골프는 상대와 몸을 부딪치며 경쟁하는 격렬한 스포츠는 아니다. 골프는 혼자 외롭게 싸우는 운동이기에 이를 악 물고 버텨낼 수 ‘부상 투혼’이 자주 연출된다. 축구와 농구처럼 상대와 몸싸움을 해야 하고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큰 충격을 받을 수 피지컬 스포츠 요소가 강한 종목에서는 부상을 안고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선수들에게 ‘부상 투혼’은 숙명일지 모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는 4년을 기다려온 대회이니 만큼 부상이 있더라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투혼을 불사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부상을 숨기고 출전을 강행하는 선수도 있다. 국제종합대회나 국가대항전, 프로 대회 등에서도 ‘진통제 투혼’이 종종 화제가 되기도 한다. ‘체조 요정’ 손연재는 지난 7월 광주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진통제를 맞고 발목에 감각이 없을 정도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3관왕에 차지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부상 투혼은 끈기와 집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꼭 이루고 말다는 각오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 단단해야만 다른 선수들과 경쟁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박인비도 KPMG 여자 PGA 챔피언십과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시련을 잘 극복해냈다. 그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 앞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자’는 목표만 생각했다. 그래도 선두권과 멀어져 정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는데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인비는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는 프로암 도중 찾아온 등근육 담증세로 대회 포기를 고심했다고 한다.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는 허리 통증이 심해져 프로암까지 불참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박인비는 꾸준히 마사지를 받으며 상태 호전에 힘썼고, 포기하지 않아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
아픈 선수가 ‘사고’를 칠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정상급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퍼스타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으며 기적을 연출한다. 그리고 아픈 선수의 ‘잃을 게 없다’는 마음가짐도 무섭다.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기에 욕심을 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샷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부담감을 털고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다.
박인비는 “이번 주에 허리도 안 좋고, 샷도 안 좋은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부담을 덜 같고 경기에 임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우승의 원동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임경빈 JTBC골프 해설위원은 “아픈 선수들을 조심해야 하는 건 마음을 비우고 경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프가 심리적인 종목이라 부상을 안고 있는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는 경우가 나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타이거 우즈는 2008년 US오픈에서 무릎 부상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상황에서도 무서운 집념과 집중력을 발휘해 '91홀 혈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골프파일]
실력과 심리적인 편안함 외에도 집중력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통증이 여전하기에 긴장감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긴장감 때문에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셈이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적절한 긴장감은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윤활유가 된다. 타이거 우즈(미국)가 2008년 US오픈에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91홀 혈투’를 우승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도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했기 때문이다.
1950년 US오픈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선수생활 사망 선고까지 받았던 벤 호건(미국)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집념과 집중력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결국 아픈 선수들이 무서운 건 부상 핸디캡을 허심(虛心)을 통한 집념과 집중력으로 극복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