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 성공은 독이었다" 안병훈①
03.16 12:01

‘한중 핑퐁 커플’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아들 안병훈, ‘미스터 올스타’ 김용희의 아들 김재호, ‘배구도사’ 김호철의 아들 김준. 이들은 스포츠스타 2세로 프로 골퍼의 길을 걷고 있다는 공통 분모가 있다.
부모의 후광으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건 안병훈이다. 물론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최연소 우승(17세10개월)을 할 정도로 실력도 가장 빼어났다. 그렇지만 안병훈도 김재호와 김준처럼 알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1부 투어에 직행하지 못해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러나 안병훈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 가사(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처럼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다. 마침내 ‘골퍼 안병훈’의 길을 찾은 그는 이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있다.
타이거 우즈 뛰어 넘는 특급 유망주의 탄생
지난 2009년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결승. 안병훈은 벤 마틴(미국)을 5홀을 남기고 7홀 차로 누르며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최초이자 최연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안병훈은 한 순간에 특급 유망주로 떠올랐다. 우승도 그렇지만 탁구로 세계를 정복한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아들이라는 배경이 더해져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본인조차 생각지 못한 깜짝 우승이었다. 안병훈은 “원래 64강이 목표였는데 운이 따라줬다”고 회상했다. 사실 안병훈은 우승 후보로도 뽑히지 못했다. 미국의 주니어 선수 중에서도 톱클래스가 아니었고, 톱10에 겨우 드는 수준이었다. 안병훈은 “US 주니어 대회에서도 2번 모두 지역 예선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은 주니어 대회 때와 달리 잘 풀렸다. 2008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안병훈은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던 2008년 부모를 따라 북경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때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예선 참가가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안병훈은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랴부랴 참가한 대회에서 안병훈은 1타 차로 아쉽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수확했다.
한해 지나 다시 돌아온 대회에서는 뭔가 조짐이 좋았다. 2009년은 PGA 챔피언십에서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물리치고 아시아 최초로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린 그 해다.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직전에 열린 PGA 챔피언십에서 ‘골프 황제’를 무너뜨린 양용은을 본 안병훈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안병훈의 우승은 기록이었다. 종전 우즈가 가지고 있던 18년 7개월이라는 최연소 우승 기록을 다시 썼다. ‘타이거 저격수’ 양용은의 포효와 안병훈의 영광이 오버랩 되면서 차세대 스타의 탄생을 예고한 장면이었다. 안병훈은 2010년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한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도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디펜딩 챔피언이 준결승까지 오른 건 1996년 우즈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전반이 끝났을 때 3홀 차로 앞섰던 안병훈은 데이비드 정에게 1홀 차로 석패하며 2년 연속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독으로 돌아온 US 아마추어 우승
예상치 못한 우승을 한 뒤 안병훈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자신도 우즈처럼 프로 무대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생각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은 잭 니클라우스와 필 미켈슨, 우즈 등 세계적인 골프 스타의 등용문이 돼왔기 때문이다. 이후 버클리대 골프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2011년 예정보다 일찍 프로로 전향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안병훈은 PGA 투어는 물론이고 유러피언투어 등 1부 투어 Q스쿨조차 통과 못했다.
캐디백을 멨던 아버지 안재형은 아들의 이른 프로 전향 결정이 못내 아쉬웠다. 선수 생활을 통해 아마와 프로의 격차를 몸소 겪었기에 프로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대학에서 실력을 더 갈고 닦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버지 안씨는 “병훈이가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최연소로 우승하는 등 성적이 좋게 나자 마치 자신이 최고인 냥 우쭐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에는 한참 멀었다 생각했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려 말도 많이 했지만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라고 냉정하게 평했다.
결국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의 업적은 골퍼 안병훈에게 독이 됐다. 아버지 안씨가 “골프라는 종목은 수명이 기니 조급해 말고 대학에서 실력을 키워라. 프로 턴을 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조언을 했지만 아들은 황소고집을 부렸다. 안재형은 “기본이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우승을 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기복이 심했고, 전체적인 경기력도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결국 프로 턴을 한 뒤 2년이라는 시간이 그냥 쑥 지나가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눈물 젖은 빵으로 버틴 3년
안병훈은 US 아마추어 오픈 우승 프리미엄으로 2010년 마스터스, US 오픈, 디 오픈에 차례로 출전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꿈에 그리던 무대를 밟았고 목표가 더욱 뚜렷해졌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너무나 달랐다. PGA 투어와 유러피언투어 Q스쿨에서 연이어 낙방했고, PGA 2부 투어 시드조차 따내지 못했다. 안병훈은 “정말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준비가 덜 됐다는 아버지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안병훈이 유일하게 뛸 수 있었던 무대는 유러피언투어 2부인 챌린지 투어뿐이었다. 선택권이 없었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부 투어의 생활은 꽤 길어졌다.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안병훈은 안재형과 함께 8~9시간 동안 자동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돌며 1부 입성을 꿈꿨다. 무뚝뚝하고 덤덤한 성격이라 고된 투어 생활을 잘 견뎌냈지만 고달픈 시간이 이어졌다.
2012년 2부 투어에서 상금랭킹 82위에 머문 그는 2013년 25위에 올랐다. 3년째인 지난해가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기다렸던 기회는 7월 열린 디 오픈에서 왔다. 공동 26위로 한국 선수 최고 성적을 낸 안병훈은 “디 오픈에서 좋은 경기를 펼쳤고 그 속에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 디 오픈 이후로는 앞으로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허상이 아니라 필드 경기를 통해 수확한 자신감이라 무엇보다 값졌다.
안병훈은 한 달 뒤 2부 투어 롤렉스 트로피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며 불붙은 샷감을 이어갔다. 톱10에 들었던 네 차례 모두 우승 경쟁을 했고, 우승 1회, 준우승 2회, 3위 1회의 성적표를 받으면서 상금랭킹 3위에 올라 고대했던 1부 투어 풀시드를 획득했다. 그는 “2부 투어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골프가 조금씩 좋아진 것 같아 실망하지 않았다. 목표한대로 한 걸음씩 왔다”고 강조했다. 안재형도 “제 예상보다는 1부 투어 입성이 빠른 편이다. 몇 년 더 고생할 줄 알았는데 병훈이가 찾아온 기회를 잘 잡았다”라고 대견해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