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댓글러에게 경종 울린 박인비의 우승
08.22 08:25

“제가 가려고 하는 길이 맞는 걸까요.”
리우 올림픽 여자 골프를 2주 앞둔 지난 6일. 국가대표 박인비(28·KB금융그룹)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2016년 박인비는 최악이었다. 시즌 초반부터 허리 부상에 시달리더니 왼손 엄지 부상으로 4월 이후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석 달 이상 쉬면서 손가락 부상이 낫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올림픽 전초전으로 출전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투어 삼다수 오픈에서 6일 컷 탈락하자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욕심 부리다 올림픽 카드 한 장만 날리게 생겼다’, ‘리우에 가서 국민의 세금만 축낼 것’이라는 등 각종 비난이 온라인에 넘쳐났다. 박인비는 “잘 못 치면 내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고심 끝에 올림픽 출전을 결정했지만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정말 큰 용기를 내야 했다. 그러나 비겁한 사람이 되긴 싫었다”고 말했다.
박인비가 21일 올림픽 골프 코스에서 끝난 리우 올림픽 여자 골프에서 금메달을 땄다. 116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복귀한 골프에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박인비는 최종 라운드에서 5타를 줄인 끝에 합계 16언더파로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9·뉴질랜드)를 5타 차로 따돌렸다. 4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이어 올림픽 금메달마저 목에 걸면서 ‘커리어 골든 슬램’도 달성했다. 골든 슬램은 테니스에서 유래된 용어로 테니스계에서는 슈테피 그라프(47·독일), 세리나 윌리엄스(35·미국), 라파엘 나달(30·스페인), 앤드리 애거시(46·미국) 등 4명이 달성한 대기록이다.
3라운드까지 선두 박인비와 2위 리디아 고의 타수 차는 2타였다. 리디아 고는 올 시즌 LPGA투어에서 4승을 거두면서 세계랭킹 1위 자리를 확고히 굳힌 반면 박인비는 부상으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기에 우승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인비는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우승했다.
박인비를 가장 힘들 게 만든 건 부상도 부진도 아닌 ‘악플(악성 댓글)’이었다. 박인비는 LPGA투어 메이저 7승을 포함, 17승을 거두면서 ‘돌부처’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부상 이후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악플과 싸워야 했다. 대표팀 코치를 맡은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는 “인비가 올림픽을 앞두고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올림픽 출전을 주저할 때도 비난을 받았고 막상 나간다고 할 때도 욕을 먹자 무척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인비는 위기 상황에서 더 강해지는 선수다. 지난해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는 허리 통증을 딛고 마지막 날 7언더파를 몰아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리우 올림픽에서도 그는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도 손가락 통증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냈다. 박인비는 “남편(남기협 프로)의 지도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남편의 친한 선배인 김응진 프로를 찾아가 스윙 교정을 했다. 내 골프 인생에 이렇게 열심히 연습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박인비의 손가락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박인비는 리우로 떠나기 전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올림픽을 마친 뒤 정밀 검사를 받고 필요할 경우 깁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박인비는 얼음찜질을 해가며 통증을 견뎌내고 올림픽을 치렀다. 23일 금의환향하는 박인비는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해 손가락 치료를 받기로 했다.
박인비는 “몸에 남아 있는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간 기분이다. 에너지를 충전한 뒤 다시 도전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박인비가 우승을 차지한 이날 온라인상에는 반성의 댓글이 이어졌다. ‘박인비가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나’ ‘박인비를 비난했던 네티즌들은 사과해야 한다’ 등의 댓글이 쏟아졌다. 박인비는 “내 한계를 넘어선 뒤 받은 보상”이라며 기뻐했다.
리우=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