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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해방구에서 대역전승 거둔 이상엽

06.12 17:54

이상엽 [KPGA 민수용]

“원온 하자, 문경준”,
“옆집 간다, 문경준”

12일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먼싱웨어 매치플레이가 열린 경기 용인의 88골프장 나라사랑코스 15번홀(파4). 302야드로 짧게 조성되어 1온도 가능한 이 홀에서 갤러리들은 “한 번에 올리라”고 함성을 질렀다. 맞바람이 불어 만만치 않은 거리였는데 갤러리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선수들이 안전하게 잘라 가기도 어려웠다.

문경준(34·휴셈)은 1온을 노리고 어드레스를 취했다가 갤러리 중 한 명이 “옆집 간다”(옆에 있는 그린에 올라간다)는 짓궂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자세를 풀어야 했다. 또 다른 갤러리는 “멀리건도 있어”라고 외쳤다.

주최 측은 1번 홀과 15번 홀을 이른바 ‘갤러리 해방구’로 만들었다. 골프 대회장에서 선수들이 샷을 할 때마다 갤러리들은 숨을 죽여야 하는데 이 홀에서는 마음껏 소리를 지르라고 멍석을 깔아 준 것이다.

골프장이 아니라 야구장 혹은 축구장처럼 티잉그라운드 옆에 관중석을 세웠고 개그맨 이재형씨와 아나운서 장새별씨가 사회자로 나와 응원을 유도했다. 응원을 열심히 하는 갤러리에겐 맥주도 줬다. “무조건, 무조건이야”라고 노래를 부르는 갤러리도 있었다.

김인호(23·핑)는 “일반 대회는 조용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여긴 원래 시끄러우니까 별 상관이 없더라.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대회는 미국 애리조나의 스코츠데일 골프장의 스타디엄 코스에서 열리는 PGA(미국프로골프) 투어 피닉스 오픈을 본떴다. 스타디엄 코스라는 이름답게 야구장처럼 관중석을 만든다. 특히 ‘원형경기장’ 이라는 별칭이 붙은 파 3인 16번 홀에는 2만석의 관중석이 조성된다. 이 곳에서 관중들은 맥주를 마시며 선수를 응원하거나 야유한다. 대회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골프 쇼’라고 불리며 하루에 10만 명, 일주일에 50만 명이 넘는 관중이 찾는다. 올해는 이 곳에서 로봇 골퍼가 홀인원을 해서 커다란 함성이 터지기도 했다.

대회를 기획한 데상트코리아의 정우영 스포츠마케팅 팀장은 “팬들이 아주 좋아해 지난해에 비해 갤러리 수가 2배가 됐고 호응도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좋아지고 있다. 내년에도 계속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해방구 15번 홀은 우승자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결승에서 황인춘을 상대한 이상엽은 11번 홀에서 왼쪽으로 OB가 났다. 13번 홀에서도 OB가 났다. 그러면서 10번 홀부터 13번 홀까지 4홀 연속 패배했다. 남은 홀은 다섯 홀에 4홀 뒤져 사실상 졌다.

이상엽은 14번 홀에서 또 OB가 날까봐 우드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캐디를 맡은 아버지가 “어차피 진 것 같으니까. 마음을 놓고 드라이버로 치라”고 말했다. 이상엽은 드라이버를 쳤다. 똑바로 멀리 날아갔다. 이상엽은 2.5m 버디 기회를 잡았으나 황인춘이 더 짧았다. 운이 좋게도 이상엽은 넣고 황인춘은 넣지 못했다.

한 홀 이겼지만 4홀 남기고 3홀을 뒤지고 있어 역시 패색이 짙었다. 그래서 이상엽은 15번 홀에서도 우울했다고 한다. 이상엽은 3번 우드로 칠까 고민하다 드라이버를 잡았다. 관중들이 한 번에 올리라고 함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이상엽은 팬들에게 파도타기 응원도 유도하면서 쇼맨십을 보여줬다.

이상엽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팬들과 함께 즐기려고 했다. 화끈하게 드라이버를 쳐서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나의 홍보도 하려고 했다. 그게 오히려 플러스가 됐다. 이 홀에서 이상엽의 드라이버는 그린 옆 프린지에 떨어졌다.

황인춘의 티샷은 좋지 않았다. 어프로치샷도 짧았다. 이상엽이 또 한 홀 이겼다.

표정이 굳어진 황인춘은 다음 홀 2m 버디 기회에서 3퍼트로 보기를 하면서 또 졌다. 17번홀과 18번홀에서도 실수가 나와 대역전패를 당했다.

황인춘은 10번홀부터 13번홀까지 4홀 연속 이겼으나 이상엽은 14번홀부터 18홀까지 5홀을 모두 이겨 한 홀 차로 우승했다. 이상엽은 상금 1억6000만원, 황인춘은 8000만원을 받았다.

예선을 거쳐 대회에 참가한 프로 2년 차 이상엽은 64강전에서 올해 상금, 대상 포인트 1위 최진호를 꺾는 등 파란을 일으키며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용인=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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