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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칼럼-골프장 여행

07.07 08:48

[성두현]

2009년 스코틀랜드 골프장들을 여행했다. 골프 기자로서 골프의 고향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였다. 그냥 여행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이나 성 베드로 성당 등의 성지 순례 비슷한 것이라고 느꼈다.

순례는 안락한 여행은 아니다. 고행에 더 가깝다. 순례 대상 골프장들은 한국 골프장과는 좀 달랐다. 황량하고 카트와 캐디도 없고 날씨는 궂었다. 강풍 때문에 수직으로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거친 러프 속에서 공을 찾아 헤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골프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그 유명한 스윌컨 브릿지를 건너 돌아올 때는 내 마음을 그 개울 너머 황무지에 두고 온 것을 알게 됐다.

스코틀랜드 여행 중에 다른 골프 순례자들과 몇 차례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아일랜드에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했다. 사실 기자로서 담당 분야를 바꿔 보려던 참이었는데 스코틀랜드 보다 훨씬 멋지다는 아일랜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바꾸지 못했고 몇 년 후 기어이 아일랜드에도 갔다. 아일랜드의 골프장들은 역사와 전통이 적어 성지 순례 같지는 않았지만 눈이 시리도록 멋졌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구 중위도에는 편서풍이 분다. 대륙 서쪽이 바람을 많이 받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 풍차가 있고 동쪽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란다. 바람은 파도를 일으킨다. 대륙 서쪽에 깎아지른 절벽과 거대한 둔덕이 생긴다. 미국에서도 경치가 뛰어난 골프장은 대부분 서쪽 해안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은 서유럽이지만 그 보다 더 서쪽에 영국 그레이트 브리튼 섬이 있다. 여기서 골프가 생겼다. 영국 보다 더 서쪽에 아일랜드가 있다. 아일랜드가 최전선에서 비바람과 파도를 맞는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골프장은 최남단에 있는 올드 헤드 골프장이었다. 가파른 해식애로 둘러싸인 다이아몬드 형태의 반도에 있었는데 약간 과장하면 제주 성산일출봉 위에 골프장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연륙교처럼 길고 좁은 땅이 다이아몬드를 육지와 연결했고 반도 끝에는 대형 등대가 서 있다. 라운드 후 알피니스트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것 같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최근 경남 남해 사우스 케이프 골프장에서 비슷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흐린 날씨와 간간히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 속에서도, 그러니까 해를 거의 볼 수 없었는데도 풍광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골프장 대부분의 홀이 멋졌지만 파 3홀들이 예술이었다. 14번 홀과 16번 홀에서는 세계 최고 풍광 올드 헤드에서의 감격이 밀려왔다.

14번 홀은 돌출한 좁은 곶에 있는 그린으로 샷을 하는 짧은 파 3홀이다. 티잉그라운드에서 보는 그린은 아주 예쁘지만 볼을 채가려는 바닷바람도 보이는 듯했다. 혼란하고 두렵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강렬하다. 블루 티 기준 130m 정도로 페블비치의 7번 홀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장단점이 있지만 역사나 전통을 제외한다면 사우스 케이프 14번 홀이 조금 더 매력적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생각이다.

16번 홀은 절벽과 바다를 건너 샷을 해야 하는 긴 파 3홀이다. 누구라도 절벽 위에 서면 뭔가 특별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갑자기 끊어진 육지와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바다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낀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고 영겁의 시간을 버텨온 자연에 고개가 숙여진다. 폭풍의 언덕 위에 선 히스클리프처럼 뜨거운 감정으로 불타던 젊은 시절이 되살아나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도 느끼게 된다. 이런 멋진 라운드 후에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사우스 케이프를 통해 한국의 자연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도 이제 멋진 골프장들이 많이 생겼다. 회원권의 폭락과 함께 이른바 명문이라는 간판 아래 화려한 클럽하우스와 값비싼 미술품들로 치장한 고급 프라이빗 골프장의 시대는 지난 듯하다. 한국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골프장들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제 드비치나 여수 경도, 해남 파인 비치, 제주 중문 골프장에서는 바다를 느낄 수 있다. 전세계 골프장을 여행한 백상현씨는 “국내에도 뛰어난 골프장이 많다. 덕유산 국립공원 속 무주 골프장, 강원도 강릉의 샌드파인, 대관령의 용평, 버치힐, 경기 포천 몽베르, 부산 아시아드 등도 코스가 훌륭하며 자연의 멋을 느낄 수 있다”고 추천했다.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자연이 매우 아름다운 제주도 골프장 투어도 괜찮을 것 같고, 녹차 밭을 둘러 볼 수 있는 보성 골프장처럼 향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곳도 있으리라.

한국의 골프 문화는 미국과 일본을 거쳐 오면서 약간 왜곡됐다고 본다. 접대 골프의 비중이 높고 내기가 대중화됐다. 골프장 한 라운드는 고스톱 18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뽑기 등이 성행한다.

골프 한 라운드는 여행이다. 여행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한 라운드의 끝을 대할 땐 인생의 끝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겸허하게 되고 주위 사람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이왕 하는 골프 라운드, 골프 여행을 좀 더 멋지게 했으면 좋겠다. 진지한 골퍼라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여행을 꿈꾸면서 살면 더 행복할 것이다. 겨울 동남아 골프 여행도 무제한 36홀이 아니라 라운드 후 오래 기억될 골프장들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도 같다. 이제 우리 골프장들도 멋지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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