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연 "나는 샤론 스톤이라고 세뇌했다"
07.01 08:29

오정연은 노란색 트레이닝복에 일본도를 든 영화 킬 빌의 복수의 화신 우마 서먼이 됐다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다리를 꼰 채 노골적으로 형사를 유혹하던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이 됐다. 10년 방송 생활을 접고 ‘프리’를 선언한 후 오정연은 다소곳한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그가 처음 나온 곳은 골프계다.
매출 1조2천억원이 넘는 SG그룹은 스크린 골프 시장에 진출하면서 강렬한 임팩트를 주려 했던 것 같다. 강렬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를 패러디한 광고를 했다. 오정연은 아이언을 들고 똑같은 마스크를 쓴 수십 명의 남성들과 맞선다. “다 똑같은 너희들 SG로 한 판 붙자”라는 자막과 함께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오정연은 악녀 샤론 스톤이 된다.
샤론 스톤은 원초적 본능에서 담배를 물고 매우 어두우면서도 도발적이고 뇌쇄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아직도 많은 중년 남성들이 1992년에 나온 이 영화 주인공의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남성들을 파탄에 빠뜨리는 그 눈빛 말이다.
너무 야한 이미지여서 부담스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오정연은 “그 이미지는 나랑은 완전히 상극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살면서 누군가를 유혹해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편하고 친근한 스타일인데 영화 속 샤론 스톤은 도발적이고 이런 표정 연기가 너무 멋쩍었다”고 했다.
오정연은 “아나운서 때는 정갈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광고에서 딱 붙는 옷을 입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다리 꼬고 치마 짧고 그런게 적응이 안됐다”고 했다.
그래도 했다. 오정연은 “나는 샤론 스톤이다라고 세뇌시켰다. 내가 영화에 나오는 저 여자라고 생각했다. 앞에 남자 모델이 유혹 당하는 연기를 해줬는데 그 것도 도움이 됐다”고 했다. 광고에는 오정연을 보고 침을 흘리는 뚱뚱한 아저씨가 있다. “그 사람은 아니다. 그 사람 말고 괜찮은 사람이 유혹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웃었다. 오정연은 “그 분이 유혹당하는 표정을 보니까 자신감이 생겨서 그럭저럭 잘 된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도 피가 낭자한 우마 서먼이나 얼음 송곳을 든 샤론 스톤이 오정연과 딱 오버랩되지는 않는다. 오정연의 트레이드 마크인 양쪽 볼의 깊은 보조개는 너무나 부드럽다. 귀여운 이미지가 더 많다. 차가운 연기파 배우가 아니라 친근한 오정연이 나왔기 때문에 이 코믹한 패러디 광고는 더 눈길이 간다.
오정연은 담백했다. 가식이 거의 없었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했다. 요즘 잘 나가는 전 남편 서장훈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밝았고 새로운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영화 킬빌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광고에서 나오는 우마 서먼과 남성들과의 칼싸움 씬만 봤다. “진짜 칼이라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골프 클럽은 헤드 때문에 너무 무거운 것 같다”라고 했다.
학창시절 싸움도 해봤냐고 했더니 “공부만 하는 학생도 있고 친구들이랑 추억 만드는 부류도 있는데 나는 그 중간이었다”고 했다. “무슨 추억?” 오정연은 약간 발을 뺐다. “교실 뒤에 앉아 있는 키도 크고 노는 친구들이 나를 스카우트하려 했다. 속된 말로 띵까자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못하겠더라. 걔네들은 노래방, 비디오방 가고 했는데 나는 규율을 어기지는 못했다. 걱정되고 용납이 안 되더라. 마음이 약해서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하고 학교에서는 같이 놀기는 했다. 그러나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오정연은 스포츠 캐스터 지망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등이 약간 굽어서 체형을 예쁘게 만들어주기 위해 어머니가 발레를 시켰다고 한다. 사실 오정연은 발레보다는 리듬체조에 끌렸다. 체육시간에 나무 막대기에 리본을 달고 춤을 추고 훌라후프에 백스핀을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듬체조를 배울 곳이 없어서 발레를 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갔다. 오정연은 “머리가 아주 좋거나 아이큐 높은 것은 아닌데 목표가 생기면 집중을 하기는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성적이 별로였고 서울대는 생각도 안했는데 2학년 여름 성적을 쑥 올렸다. 중학교 때는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과천고가 입학하기가 어려운 학교였는데 거길 목표로 삼았더니 모의고사 50점이 오르더라. 고등학교 3학년때도 예체능 전국 상위 3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올렸다. 뭔가 집중하면 프로 의식이 생기고 악바리같이 된다.”
고등학교 때 발레를 다시 했다. 공백 때문에 발레리나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발레 근처에 있고 싶었다. 무용 교수나 국립발레단 의상 담당 같은 것이 꿈이었다.
어느 날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대학 때 성실했다. 완벽주의자 성격도 좀 있고 수업, 학점 관리를 잘 했다. 친구들 시간표도 내가 다 짜줬다. 좀 피곤한 스타일이기도 하다. 아나운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강의계획서를 보고 발표수업이 있으면 그 수업을 아예 듣지 않았다. 그러다 2학년 때 스포츠 경영학시간에 갑자기 자기의 비전을 발표하라고 했다. 너무나 떨렸는데 수업 후 교수님이 부르셔서 스포츠 캐스터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발표하는 모습을 보니 그게 떠오른다고. 우리나라 여자 캐스터가 거의 없으니 블루오션이고 체육 전공이니 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그래서 ‘아 아나운서라는 길이 있구나’하고 진로를 정하고 공부를 했다.”
아나운서를 했지만 스포츠 캐스터에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방송국에 입사해서는 신입 아나운서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얼굴이 알려지면 교양, 예능을 하게 됐다. 오정연은 스포츠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줄어들었고, 회사에서도 스포츠 캐스터는 당연히 원래 하던 분들이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작년 말 10년 전의 꿈을 이뤘다. 지상파 방송 3사에서 중계 경쟁이 붙으면서 대중적 인기가 있는 인물들을 투입했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KBS는 이영표를 투입해 대성공을 거뒀고 다른 종목에서도 변화를 줬다. 아시안게임 리듬체조에서도 메달이 확실시되어 다른 방송사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자 오정연에게 기회를 줬다. 오정연은 당시 체조프로그램을 하고 있던 터였다.
오정연은 “사표 쓰기 직전이었는데 우연이 아니라 운명 같기도 하다. 다른 방송도 보람 있지만 중계는 대본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전에 하던 방송과는 다른 차원의 희열을 느꼈다. 스포츠 캐스터를 하고 마무리해서 뿌듯하다. 김성주씨처럼 다른 방송을 하면서도 기회가 된다면 스포츠 캐스터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원하는 종목은 리듬체조, 싱그로나이즈드 등 여성 종목이다. 발레를 했기 때문에 예술성 있는 스포츠가 오정연에게 맞을 것 같다고 한다. 골프에도 관심이 있단다. “약간 정적이면서 부드러움이 가미되는 종류의 스포츠 중계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골프는 2년 전에 다른 사람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시작해 재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뒀다가 올해 다시 시작했다. 우연히도 그 때쯤 SG에서 광고 모델 섭외가 왔다. 이번엔 제대로 배워보자 광고에 스윙 폼도 제대로 나가야 하니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진짜 열심히 매일 레슨 받아 보자고 했다.
“120타 쯤 되느냐”고 물었더니 발끈했다. “최근 103개와 105개를 쳤다. 동반자들이 조금 봐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정도로 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오정연은 “골프가 유연성 운동인데 발레를 했기 때문에 아주 어렵지는 않다. 몸을 이용해서 하는 것은 잘 하는 편이다. 허리가 유연해서 회전이 잘 된다는 말도 듣는다. 하체 힘이 부족한 것은 문제”라고 했다.
광고주 홍보도 했다. 그는 “SG스크린 골프는 화면이 선명하다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 실력 보다 더 멀리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오히려 스크린에서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이 스윙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아직 초보지만 골프의 매력도 아는 것 같다. “편한 사람들이랑 광활한 자연 속에 있으니 세상만사 다 잊을 수 있었다. 골프가 좋아질 것이라는 느낌이 확 오더라. 그 전에는 공을 띄우지 못해 재미가 없었는데 공이 뜨고 나니 달라졌다. 골프는 건강도 챙기고 친목 도모에 게임의 재미도 있는 3박자를 갖춘 스포츠”라고 말했다. 골프 얘기를 할 때 그의 보조개가 더욱 깊이 들어갔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