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목록

성호준 칼럼-브로콜리 그린 위의 더스틴 존슨

06.23 08:15

마지막 홀 버디 퍼트를 놓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파 퍼트를 하는 더스틴 존슨. [골프파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났다. 더스틴 존슨이 22일 열린 US오픈에서 넣으면 이길 수 있었던 이글 퍼트를 실패하고, 연장에 갈 수 있었던 1.2m 버디 퍼트도 넣지 못하고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성큼성큼 그린 밖으로 걸어갈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패자가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퍼트를 하기 전부터 패배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하고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 다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를 안고 그 긴 다리(키 193cm)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그의 부인은 배우와 모델로 헐리우드와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폴리나 그레츠키다. 장인은 웨인 그레츠키다. 맞다. 아이스하키의 전설 웨인 그레츠키다. great one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 우즈 급의 포스를 가진 그 그레츠키가 맞다.


[게티이미지]


그러나 존슨은 그 화려한 처갓집 식구들의 위용과 달리 마치 패배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은 선택받지 못한 자인 것처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기장을 떠났다.

이번 대회 그린이 울퉁불퉁해서 말이 많았다. 헨릭 스텐손은 브로콜리 위에서 퍼트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로리 매킬로이는 브로콜리는 초록색이기 때문에(누리끼리한 그린과 달라) 이에 동의할 수 없으며 꽃양배추의 표면 같았다고 농담을 했다. 세르히오 가르시아는 NBA 결승을 구멍 뚫린 코트에서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언 폴터가 SNS에 올린 그린 표면의 확대 사진을 보면 퍼트하기에 적당한 잔디 종류는 아니었다. 러프에 많이 쓰이는 파인페스큐인데 롤러로 짓눌러도 완전히 누를 수는 없었다. 퍼트한 공을 느린 화면으로 잡은 TV에서는 공이 울퉁불퉁한 표면에 튀어 땅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체공시간이 더 긴 듯도 했다.

그래도 넣어야 했다. 정상급 스포츠 선수는 바다를 만나면 해군이 되고 땅을 만나면 육군이 되어야 한다. 정글을 만나면 유격전을 펼쳐야 하고 땅이 안 좋으면 땅굴이라도 파고 버텨야 한다. 그랜드슬램을 노리는 테니스 선수가 하드코트, 잔디코트, 클레이코트를 구별하면 안 되듯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야 한다. 브로콜리든 양배추든 어떤 그린에서도 누군가 우승을 한다. 이번 대회는 그린으로 논란이 일어났지만 최고 선수들이 잘 쳤고 결국 명승부로 남을 것이다.


[골프파일]


조던 스피스는 존슨의 마지막 홀 이글 퍼트가 들어가지 않아 연장에만 갔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존슨은 4m가 안되는 이글 퍼트를 놓치고 1.2m 퍼트도 넣지 못했다. 냉정히 얘기하면 홀을 스치지도 않았다.

존슨은 “마지막 홀 3퍼트에 실망했지만 그걸 빼고는 아주 좋은 한 주였다. 메이저대회에서 다시 우승 기회를 잡은 내 경기력에 만족한다”라고 했다.

조금 지나 이 보다 조금 더 속마음을 보여줬다. “내가 평소의 반만 퍼트를 넣었다면 몇 타 차로 아주 여유 있게 우승했을 것이다. 마지막 퍼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모른다. 약간 당겼을 수도 있고 바운스 때문에 왼쪽으로 튕겼을 수도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번이 내 차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승을 놓치고 나서 존슨은 당연히 아쉬웠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한 것은 원래 성격상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데다 남자답게 의연하게 보이려는 행동으로 추측된다.

그렇다 해도 패배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 익숙했다. 그 가슴이 찢어지는 퍼트를 넣지 못했다면 고개를 숙이거나 반대로 고개를 들어 비정한 골프의 신을 원망하거나, 주저앉거나, 야채를 싫어하는 아이가 식탁에서 고추장과 함께 나온 브로콜리를 보듯 울퉁불퉁한 잔디를 노려보거나, 왜 이쪽으로 퍼트하라고 했느냐는 표정으로 캐디를 째려보거나, 퍼터 샤프트를 이빨로 물거나, 자기 머리를 쥐어박거나, 하다못해 한숨이라도 한 번 쉬어야 정상일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듯 손을 털고 악수를 하고 갔기 때문에 이렇게 될 것을 혹시 예측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실패할 것에 대비하고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됐다.

존슨은 메이저에 대한 상처가 있다. 2010년 US오픈 최종일 3타 차 선두로 나섰다. 페블비치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가 이 골프장에서 열린 일반 대회에서 우승을 해봤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우승이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마지막 날 82타를 치면서 고꾸라졌다. 그는 심지어 헛스윙도 했다.

두 달 후 PGA 챔피언십에서는 마지막 홀 단독 선두였는데 벙커를 웨이스트 에어리어로 생각하고 클럽을 지면에 댔다가 2벌타를 받고 트리플보기가 되면서 패했다. 이듬해 디 오픈에서도 우승 근처에서 2번 아이언으로 OB를 내면서 우승을 날렸다. 아직 메이저 우승이 없다.

존슨은 PGA 투어 9승을 했다. 세계랭킹은 3위다. 올해 US오픈으로 인해 그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 중 최고 선수(Best Player Never To Have Won A Major) 자리에 공식 등극했다. 칭찬은 아니다. 메이저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선수라는 의미다.

더스틴 존슨은 능력이 출중하고 아직 젊다. 현역선수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신체적인 재능만으로 보면 전성기 타이거 우즈 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덩크슛을 할 수 있는 선수다. 아이언샷을 가장 높이 치는 선수다. 로리 매킬로이와 더불어 드라이버를 가장 똑바로 멀리 치는 선수다.

메이저 우승의 기회가 또 올 것이고 언젠가는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특히 출전 선수 수가 적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선수들도 있는, 그러니까 출전만 하면 우승이 상대적으로 쉬운 마스터스 같은 대회에서 기회가 있을 것이다. 디 오픈이나 PGA 챔피언십에서도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US오픈이라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US오픈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저주 비슷한 것도 있다.

두 가지다. US오픈에서 우승한 무명 선수는 다른 대회에서 우승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US오픈은 존슨처럼 재능이 뛰어난 선수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두 번 우승을 놓치면 우승컵을 잘 주지 않는다. 계속 기회는 주는데 정작 우승컵은 주지 않아 더 약이 오른다.

샘 스니드는 PGA 투어 최다인 82승을 했지만 US오픈에서는 우승을 못했다. 메이저 7승인데 US오픈 때문에 커리어 그랜드슬램도 실패했다. 우승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위를 4번 했다. 5위 이내에 든 것은 7번 이었다. 56세에도 톱 10(9위)에 들었고 61세에도 컷을 통과해 29위를 했을 정도로 US오픈에서 강했다. 우승을 못한 것만 빼면 그렇다.

1939년 파 5인 마지막 홀에서 보기만 하면 우승이었는데 스코어를 몰라 버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라이버 훅을 내고 러프에서 2번 우드를 치다가 페어웨이 벙커에 빠졌는데 또 무리해서 그린을 공략하다 벙커턱에 맞아 나오지 못하는 등 좌충우돌하면서 트리플 보기를 했다.

1947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무명인 류 워셤과 치른 연장전에서 동타로 마지막 홀에 왔다. 짧은 파 퍼트를 남겼다. 스니드가 어드레스를 해 퍼트를 하려는 순간 워셤이 중단시켰다. “당신 공이 내 공보다 홀에서 더 멀다고 확신할 수 있나.” 스니드는 결국 경기위원을 불러 자로 거리를 재야했다. 스니드가 31인치(79cm), 워셤이 29.5인치(75cm)였다. 스니드가 먼저 하는 게 맞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스니드가 퍼트를 했는데 홀을 돌아 나왔다. 워셤이 우승컵을 가져갔다.

필 미켈슨도 US오픈 악몽이 있다. 역시 US오픈 때문에 그랜드슬램이 안 된다. 사실 우승 기회는 누구보다 많았다. 2위도 가장 많이 했다. 1999년 임박한 부인의 출산 때문에 삐삐를 차고 경기했다. 우승 퍼트를 앞두고라도 삐삐가 울리면 집으로 가겠다면서다. 삐삐는 울리지 않았고 2위를 했다. 2006년엔 1타차 리드를 안고 마지막 홀에 들어섰는데 티샷이 어려운 홀에서 드라이버를 잡았다가 더블보기를 하면서 우승을 헌납했다. 경기 후 “나는 정말 바보”라고 말했다.

우승자인 조던 스피스의 장점은 기술적으로는 퍼트가 좋고 정신적으로는 아픈 기억을 빨리 잊는다는 것이다. 17번홀 더블보기를 털어버리고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 우승했다.


[골프파일]


존슨이 2010년 US오픈 우승을 날린 82타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올해도 패배를 미리 예상하고 준비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승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존슨 자신을 포함해 지그문트 프로이드도,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다.

조금 더 분명한 건 존슨이 올해 US오픈 마지막 홀에서 짧은 퍼트를 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린을 떠나면서 아픈 기억을 털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른한 살 생일이었는데 브로콜리 그린에 저주라도 퍼부었다면 그나마 속이 시원했을 것 같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 공유

자랑하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