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세컨드샷-역사적인 박인비의 퍼펙트게임
03.10 07:00

박인비의 LPGA 투어 HSBC 위민스 챔피언스 우승은 저평가됐다. 72홀 동안 보기를 하나도 하지 않고 우승한 일이 이전에 있었는지 LPGA 투어에 문의했는데 아직 답이 없다. 너무나 나오기 힘든 기록이기 때문에 기록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니카 소렌스탐이 노보기 우승을 했는지 뒤져봤는데 못 찾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LPGA 사상 첫 72홀 노보기 우승일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단한 일이다.
PGA 투어에서는 41년 전인 1974년 이후, 유러피언 투어에서는 1995년 이후 노보기 우승이 없다. PGA 투어와 유러피언 투어에서 그 전에 노보기 경기가 있었는지는 역시 기록이 없다. 잭 니클라우스나 벤 호건이나 바이런 넬슨이 혹은 무명의 누군가가 메이저가 아닌 작은 대회에서 했을 수도 있고 못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72홀 동안 보기가 하나도 없다면 완벽한 경기고 야구로 치면 퍼팩트 게임이다. 아니 이 보다 훨씬 어렵다. 야구에서는 27타자에게 이기고 승리하면 퍼펙트(1루에 한 번도 주자를 진루시키지 않는 경기)지만 골프는 72홀을 버텨야 한다. 그 중 한 번이라도 지면(보기를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잘 안 나온다.
메이저리그에서 1900년 이후 퍼펙트 게임이 21번 나왔다. 1974년 이후로만 보면 PGA 투어 노보기 우승은 한번도 없었고 메이저리그 퍼펙트게임은 14번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최근 퍼펙트게임은 2012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했다. 2012년엔 메이저리그에서 3번의 퍼펙트게임이 나왔는데 그 중 한 번은 올해 KIA에서 뛰게 될 필립 험버가 시카고 화이트 삭스 유니폼을 입고 세웠다. 투고타저,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의 크기 등 당시 유행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들곤 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퍼펙트 게임이 한 번도 없었다.
골프 노보기 경기는 타이거 우즈도 못해봤다. 2002년 WGC 아메리칸 익스프렉스 챔피언십에서 3라운드까지 우즈는 보기 없이 19언더파를 쳤다. 그러나 4라운드에서 노보기 기록을 이어가지 못했다. 한 라운드에서 보기 없는 경기를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만약 한 라운드에서 노보기 경기를 할 확률이 10분의 1이라면 두 라운드는 100분의 1, 세 라운드는 1000분의 1, 네 라운드 연속 보기가 없을 확률은 1만분의 1이 된다.
산술적으로는 이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노보기와 우승에 대한 압박감은 더 커진다. 핀은 어려운 곳에 꽂힌다. 실제로 골프 퍼펙트 게임의 가능성은 산술적 계산보다 작아진다.
만약 골프가 아니라 심판이 있는 종목이라면 어땠을까. 타이거 우즈는 2002년 아멕스 챔피언십에서 퍼펙트게임을 했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으로 기자는 본다. 타이거 우즈같은 대스타가 대기록을 앞에 뒀다면 많은 팬들과 미디어가 관심을 가진다. 모두가 원하는 기록을 심판이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우즈가 대기록을 앞두고 마운드에 오른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 투수였다면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은 조금 더 넓어질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허재가 노장이 됐을 때 농구 코트의 심판들은 후한 판정을 했다.
골프는 다르다. 골프 볼과 코스는 눈도 없고 뇌도 없고 심장도 없다. 우즈든 양용은이든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파가 될 뻔한 아쉬운 보기를 파로 잡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골프의 퍼펙트게임인 노보기 경기가 다른 스포츠보다 더 어렵다. 악천후를 만나지 않는 등의 운도 작용해야 한다.
박인비는 혼다 타일랜드 3라운드 16번 홀 보기 이후 92홀 연속 노보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역시 연속 노보기홀 기록이 없기 때문에 박인비가 골프 역사에 어느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엄청난 것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전 세계랭킹 1위 루크 도널드(잉글랜드)가 102홀 연속 노보기 기록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유러피언 투어 두바이 월드 챌린지라는 특정 대회에서 2년에 걸쳐 세운 것이다. 큰 의미를 둘 수는 없다.
도널드는 매우 정교하고 실수가 없으며 특히 퍼트를 잘 한다. 버디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보기를 안 해서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선수다. 그런 그도 “내 연속 노보기 기록은 40~50홀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올해 PGA 투어 AT&T에서 브렌트 스네데커가 2라운드까지 보기가 없었는데 미국 미디어가 술렁술렁했다. 그래 봐야 36홀이다. 박인비의 92홀이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도널드는 이른바 102홀 노보기 행진 중 우승을 하지도 못했다. 우승을 못했다면 노보기라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으로 9이닝 동안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를 아무도 1루에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정규 이닝 동안 0-0으로 비겼고 10회 안타를 맞고 물러났다. 그의 팀은 승리를 거뒀지만 마르티네스의 승리가 아니었다. 퍼펙트게임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유사 퍼펙트게임’으로만 회자된다. 박인비는 세계랭킹 1위, 3위와 한 조에서 싸워 이겼다.
박인비의 HSBC에서 무아지경의 경지인 ZONE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4라운드 리디아 고가 공동 선두로 쫓아왔을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2013년 3연속 메이저 우승을 할 때도 비슷한 눈빛, 표정이었다.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 같은 위대한 선수들은 평범한 선수 보다 존에 더 자주 들어가고, 한 번 들어가면 더 오래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4라운드 내내 존에서 머문 박인비도 이 부문에서는 최정상급이다. 박인비는 “목요일부터 4라운드 내내 선두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또 “내가 생각해도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이번 주 유럽여자 투어 미션힐스 월드레이디스에 나간다. 개인적인 노보기 기록은 연장될 수 있지만 LPGA 투어가 아니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LPGA 투어 대회에 가야 기록이 이어질 것이다.
노보기 기록은 미국 시니어 투어에서는 가끔 나온다. 지난해 8월 딕스 스포팅 굳즈 오픈에서 베른하르트 랑거가 노보기 우승을 했다. 시니어 투어는 대부분 3라운드다. 노보기 경기를 할 확률이 4라운드 대회에 비해 훨씬 높다. 또 코스가 별로 어렵지 않다. PGA 투어, 유러피언 투어, LPGA 투어처럼 변별력에 중점이 둔 투어가 아니라 즐기는데 치중한다.
결론적으로 박인비의 노보기 우승과 아직 끝나지 않은 92홀 노보기 기록은 엄청난 기록이다. 상당히 저평가된 기록이기도 하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