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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세컨드샷-골프 중계에서 숨은 그림 찾기

01.28 11:50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아멘코너의 가운데에 있는 12번홀(위)과 이를 카피한 오칼라 골프장 11번 홀.

거센 파도 소리가 들리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몰아치는 비바람 속으로 낮은 아이언샷을 날리는 꿈을 꿔본 적이 있는가. 4월의 흐드러진 철쭉이 감싸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융단 같은 그린 위에서 내리막 퍼트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봤는가.

우리 삶에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날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쉽지도 않다. 너무 멀고 부킹이 잘 안 된다. 특히 오거스타 내셔널 같은 철저한 프라이빗 클럽은 회원과 동반하지 않으면 라운드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전 세계 유명 골프장의 시그내처 홀들만을 모아 만든 이른바 레플리카(복제품) 코스들이 있다. 실제 못 가보지만 그 분위기라도 느껴 보라는 것이다. 이 모방의 원조는 미국 플로리다 주 중부 오칼라에 있는 골든 오칼라 클럽이다.

LPGA 투어를 좋아하는 팬들은 "나도 안다"고 했을 것이다. 맞다. 이 골프장은 올해 LPGA 투어 개막전인 코츠 챔피언십이 열리는 골프장이다.

1986년 세계 유명 홀들을 처음으로 복제했다. 복제의 원조인 셈이다. 세인트 앤드루스의 1번홀과 17번 홀, 오거스타 내셔널의 12번 13번 홀, 발투스롤의 4번홀 등 8개 홀이 복제홀이다. 이 코스를 디자인한 론 갈은 “코스 디자이너로서 창의적이고 독특한 코스를 만들고 싶기도 하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링크스를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골든 오칼라 뿐 아니다. 인근 올랜도에 있는 그랜드 사이프러스 골프장의 뉴코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통째로 베꼈다.

저작권은 문제가 없을까. 오리지널들은 당연히 화가 났고 실제 소송도 벌어졌다. 94년 미국 휴스턴 인근에 PGA 투어의 유명한 홀 18개를 카피한 ‘투어 18’ 골프장과 복제 대상이 된 페블비치, 파인 허스트 골프장 간의 소송이 열렸다. 법원은 투어 18의 야디지 북 등에 원작의 이름을 쓰지 못하게는 했다. 그래도 코스 폐쇄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법원은 이름을 명시적으로 쓰지 않으면 광고도 할 수 있게 했다. ‘잠재 수익을 복제코스에 빼앗겼다’는 오리지널의 주장에 대해서 법원은 “레플리카 코스는 실제 코스에 대한 동경을 더 크게 한다”면서 이유 없다고 했다. 복제골프장들은 “명품도 가짜를 구매한 사람이 실제에 대한 동경을 더 가지게 되고 진짜 제품을 사게 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레플리카 코스의 승리였고 복제 코스가 더욱 많이 생기게 됐다.

미국은 최근 골프 잡지에서 레플리카 코스 중에서만 톱10 코스를 정할 정도로 많은 복제 코스가 생겼다. 토론토의 우든 스틱 코스는 2000년 캐나다의 가장 큰 골프 잡지에서 최고의 신 코스로 선정될 정도로 퀄리티도 높아졌다. 피트 다이가 만든 다이 디자인, 잭 니클라우스의 니클라우스 디자인 등 명성이 높은 코스 설계 회사들도 레플리카 코스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본격 레플리카 코스 이전에도 복제는 많았다. 잭 니클라우스가 가장 아끼는 뮤어필드 빌리지는 그가 첫 디 오픈 우승을 차지한 스코틀랜드 뮤어필드 코스에 대한 일종의 헌사다. 올드 톰 모리스는 자신의 고향인 세인트 앤드루스의 분위기를 영국 여러 곳에 옮겨 놓았다.

20세기 초 미국 골프장 건설 붐이 일 때 왕성하게 활동한 설계자들은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 코스의 정신을 신대륙에 건설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초창기 세워진 미국 동부의 명문 클럽들은 영국 링크스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거스타 내셔널도 바비 존스가 올드 코스를 재현하려 한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제되는 코스는 메이저 챔피언십이 열린 홀들, TV에 자주 나오는 홀들, 어렵다고 명성이 높은 홀들, 역사적으로 중요한 홀들, 너무 멀어서 가기 어려운 곳의 홀들이다.

뉴욕의 스카이라인, 피라미드, 베네치아 운하를 다 베껴다 놓은 복제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는 스코틀랜드 링크스만을 복제한 코스도 있고 유명한 파 3홀만 카피한 코스도 있다. 특정 코스 설계자를 기려 그의 홀들을 모사한 트리뷰트 코스도 있다. 미시간주에 있는 로스 메모리얼 클럽은 도널드 로스의 홀들로만 채웠다. 뉴저지주 필립스버그에 있는 설계자의 골프 클럽은 18명의 다른 골프 설계자의 홀을 하나씩 옮겨왔다.

레플리카에 대한 비판도 많다. 유명한 홀들은 워터해저드나 벙커 등 장애물이 많다. 제대로 만들려면 토목 공사를 많이 해야 하고 건설비도 많이 든다. 원래 있던 자연에서 멀어지게 된다. 또 복제되는 코스 대부분은 아주 어려운 홀이어서 일반 골퍼들은 고난의 행군이다. 라운드 시간이 오래 걸려 일반적으로 그린피가 비싸다. 또 복제 홀은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냉소도 있다.

국내에도 레플리카 코스가 있다. 청라에 있는 베어즈베스트 골프장은 잭 니클러스가 디자인한 세계 200여개 골프장 중 베스트 홀만을 꼽아 모았다. 알펜시아 리조트의 퍼블릭 코스도 세계 명 홀들을 이미테이션했다. 국내 레플리카 코스는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지 못했다.

레플리카 코스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원조의 정신을 계승한 코스들은 창조적 모방이지만 레플리카 코스는 노골적인 모양 베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코스관리 등의 문제 땜문에 원조를 똑같이 복제했다해도 이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수준 차이가 난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레플리카 코스의 티잉 그라운드에서 메이저 대회를 중계하는 TV 속으로 들어가 챔피언십 골프의 주인공이 되어 볼 수도 있다. 최고 골퍼를 울리고 웃긴 유명 홀에서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코츠 챔피언십 중계를 보면서 찾아보시라. 골든 오칼라에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도 있고, 오거스타 내셔널도 있다. 어느 홀이 어느 홀을 모방한 건지 숨은 그림 찾기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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