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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세컨드샷-비정상의 정상화

03.31 07:05

일러스트 성두현

‘비정상의 정상화’의 뜻은 원래는 두 가지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다시 돌려놓자는 것이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얘기하고 이번 정부의 국정 어젠다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때 ‘비정상’은 나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처음엔 아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고착화되고 일반화되어 정상적인 것처럼 되어버리는 상황을 말한다. 여기서 ‘비정상’은 박대통령이 얘기하는 것처럼 부정이나 잘못된 관행, 불의 같은 나쁜 것에 주로 쓰이나 그렇지 않은 것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이 비정상은 jtbc의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하듯 그냥 낯설고 새로운 것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비정상의 정상화는 낯선 것들이 주류가 되면서 새로운 정상, 즉 뉴노멀(new normal)을 만드는 상황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처음엔 매우 이상해 보이던, 불량 청소년이나 입는 것 같았던 스키니 바지, 유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던 배꼽티 같은 것들이 일반화되는 것 말이다.

jtbc 비정상회담 패널 중 누군가가 골프를 좋아한다면 한국의 비정상 중 하나로 남자 골프 인기를 훨씬 뛰어넘는 여자 골프의 인기를 꼽을 것 같다. 스포츠의 일반론에 비추어 보면 이건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종목에서 남자는 메이저, 여자는 마이너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마이너가 메이저가 되는 이런 한국 골프의 여고남저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 버전의 ‘비정상의 정상화’의 비정상, 즉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남자 대회를 몰라보는 팬들이 야속했고, 남자 대회를 열지 않는 스폰서가 싫었다. 그래서 몇 년 전 이건 정상이 아니다는 내용의 컬럼도 썼다.

그러나 기자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 골프의 여고남저라는 비정상은 나쁜 것이 아니고 단지 새로운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 골프는 박세리로 크게 성장했으며 여자 골프의 국제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기자는 교만하고 고지식했다. 더 멀리 치고 스핀을 잘 건다고 해서 꼭 남자 투어가 여자 투어에 비해 우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골프는 공을 멀리 치는 게임이라기 보다는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정신을 보여주는 스포츠다.

기능도 그렇다. 더 따뜻하다고 해서 꼭 더 좋은 옷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요즘 옷을 보온 용도로만 입지는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옷의 가치는 기능 보다 패션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게다가 여자 프로골프는 품질도 매우 뛰어나다. 한국 혹은 한국계 여자 골퍼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 수준이 매우 높은 스포츠다. 남자 골프의 간판 스타 중 하나인 김태훈은 “한국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를 비교하면 남자가 잘 치지만 전 세계 남자 중에서 한국 선수의 위치, 전 세계 여자 선수 중에서 한국 선수의 위치를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기자는 그걸 몰랐다.

기자의 가장 큰 실수는 팬의 선택은 정당하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고객님은 항상 옳습니다’라고 할 때의 그런 맹목적인 개념은 아니다. 팬의 선택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다.

어떤 팬들이 특정 선수에게 큰 애착을 가져 실력이나 매너가 별로인데도 좋아한다면 그 선수는 스타일까 아닐까. 스타다. 어떤 책 내용이 저급하고 부실한데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면 베스트셀러일까 아닐까. 베스트셀러다. 책의 수준을, 좋은 책을 몰라보는 사회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베스트셀러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가 인기 스포츠다. 한국 사람들은 여자 프로 골프를 남자 골프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사람들이 한국 영화를 외면하고 외화를 주로 보던 시기가 있었다. 영화관계자들은 영화팬들과 극장체인을 비난했고 스크린쿼터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정부에 시위를 했다.

박찬호와 선동렬, 이종범 등의 해외진출로 한국 야구에 관중이 적던 때가 있었다. 야구인들은 새벽에 메이저리그를 보는 팬들을, 박찬호 기사만 크게 쓰는 미디어를 욕했다.

그러나 팬이 한국 영화를 봐야할, 한국 야구를 봐야 할, 남자 골프를 봐야 할 의무는 없다. 남자 골프가 잘 안되는데 누군가 책임이 있다면 그건 여자 선수들이 아니다. 팬도 아니고 미디어도 아니다. 남자 선수, 혹은 남자프로골프 협회다.

남자 골프의 인기는 그들이 해결해야 한다. 여자골프처럼 세계랭킹 1위를 내고, 메이저대회에서 3연속 우승을 해야 한다. 한국 야구가 살아난 건 야구인들이 팬을 비난하고 미디어 관계자를 욕해서가 아니라 올림픽에서, WBC에서 좋은 성적을 낸 이후다.

팬들이 대회장에 오면 감동을 주고, 기쁨을 줘야 한다. 남자 골프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그런 성과를 내기가 여자골프보다 어렵긴 하다. 그러나 팬들은 ‘남자 골프가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든 여건이 있으니 감안해줘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다. 그럴 의무는 없다.

이제 사월이다. 본격적인 골프의 시작이다. 첫 여남 메이저대회인 ANA 인스피레이션과 마스터스가 열리고 국내 투어도 시작한다. 국내 남자 선수들에겐 잔인한 달이다. 상위 60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KPGA 선수들은 나갈 수 있는 대회가 하나 뿐이다. 5월엔 일반 선수가 나갈 수 있는 대회가 하나도 없다. 여자는 7개 대회가 열린다. 순수 국내 대회상금으로 보면 4~5월 남자는 4억원, 여자는 39억원이다. 여자의 10% 정도다.

옛날 생각하면 더 화가 날 것이다. 한국 여자 프로 골프는 1978년 처음 생겼는데 남자 협회에서 프로 테스트를 받고 남자대회인 KPGA 선수권에 여섯 명이 여자부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KPGA는 상금의 10%를 떼서 여자부 상금으로 할애했다. 남자 협회에서 나눠준 10%로 10년간 셋방살이를 했다. 그러다 88년 KPGA에서 독립자금 3000만원을 얻어 나갔다.

예전엔 여자가 남자의 10%였는데 올해 봄 남자가 여자의 10%다.

현재의 위상은 이렇다. KPGA 회장을 역임한 박삼구 회장이 오너로 있는 금호 그룹이 KLPGA 대회를 연다. 맞다. KPGA가 아니라 KLPGA 대회를 연다. KLPGA 구자용 회장은 지난해 9월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서 “KPGA에 쌀독의 쌀을 퍼주고 싶다만 그럴 여유까지는 아니다”라고도 했다.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 것이 현재 남자 골프의 위치다. 남자 프로 골프 협회에서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선수들은 얼마나 열심히 뛰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봐야 한다. 옛날에 잘 나갔으니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남자 프로 골프를 외면하는 팬을 비난하지도 말자. 팬의 선택은 옳다. 아니 정당하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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