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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정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라운드

03.30 02:23

안병훈과 이재경은 처음으로 트로피 핫산 2세 대회에 출전해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가디르=김두용]

속살을 드러낸 ‘비밀의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일부 선수들에게는 ‘배반의 장미’처럼 잔인했다.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4세의 정원에서 열린 트로피 핫산 2세 대회가 30일(한국시간) 막을 내렸다. 모로코 아가디르 로열 골프장(파72)은 4년 동안 유러피언투어 대회를 위해 개방됐다. 채리티 대회를 포함해 1년에 딱 두 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데 올해를 끝으로 다시 문을 닫게 됐다. 2016년 대회는 다시 모로코 수도 라바트의 로열 에스 살램 코스로 돌아가게 된다. 에스 살램 코스도 로열이 앞에 붙지만 성곽 안에 코스가 있는 건 아니다. 아가디르 로열 골프장으로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이 없기에 이번 대회는 더욱 특별했다.

로열 골프장은 파크랜드와 링크스를 절묘하게 섞었다. 솥뚜껑 그린과 2, 3단 그린이 주를 이루는 이 코스는 365일 처절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코스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200년 이상 된 유칼립투스 나무는 거친 강풍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시원한 그늘을 내줬다. 페어웨이 좌우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마치 열매처럼 열려 있다. 하지만 이 꽃들은 바람이 불 때면 바다 속 산호처럼 변해 심술을 부린다. 선수들의 공을 재빠르게 낚아챈 뒤 좀처럼 다시 내놓지 않는다.


로열 골프장 3, 4번 홀에서는 아가디르 해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2번 홀부터는 4번 홀까지는 대서양의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샷을 날릴 수 있다. 누구든 이곳에서 샷을 하면 한 폭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된다. 멀리 해변에는 아가디르의 랜드마크인 카스바가 보이는데 아랍어로 god(신), country(나라), king(왕)이라는 3가지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왕의 정원’은 아가디르 전체를 볼 수 있는 스카이타워인 셈이다.

세계랭킹 79위 이와타 히로시(일본)는 코스의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악령에 홀린 듯했다. 이와타는 1라운드에서 17번 홀까지 무려 12타를 잃었고, 결국 기권을 선언했다. ‘산호’의 심술에 휘둘린 이와타는 클럽을 3개나 부러뜨리는 등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코스에는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클럽하우스도 없었기에 이와타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고, 짐을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키 안병훈과 아마추어 이재경도 왕의 초대장을 받고 이 신비한 코스를 처음으로 누볐다.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4개, 보기 4개로 타수를 줄이지 못한 안병훈은 2언더파 공동 34위로 경기를 마쳤다. 유러피언투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코스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에서 안병훈은 하루도 오버파를 치지 않고 선전했다. 나흘 내내 오버파를 적지 않은 선수는 단 10명에 불과했다.

이날도 30개의 퍼트를 했는데 만약 까다로운 그린을 잘 요리했더라면 안병훈이 ‘영광의 검’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칸자르’라는 검은 칼날이 S자 모양으로 휘었다. 예전에는 모로코인들이 많이 차고 다녔던 이 검은 요즘에는 대부분이 장식용이고, 선물을 할 때는 최고의 영광이나 신의를 뜻한다고 한다. 모로코의 왕자 물레이 라시드가 국왕 대신 우승자에게 검을 수여한다.


로열 골프장 1번 홀의 전경.

안병훈은 코스에 대한 소감을 묻자 “재밌다”라고 답했다. 코스가 어렵지만 도전적이고 샷이 좋으면 괜찮은 스코어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왕의 코스를 지배하는 쾌감을 맛볼 수도 있어 어렵지만 잘만 하면 더욱 흥이 날 수도 있다. 그는 “이런 코스는 정말 오랜 만에 쳐보는 것 같다. 코스가 잘 정돈돼 있고 캘리포니아의 코스 느낌도 살짝 난다”라고 설명했다. 오거스타처럼 파크랜드형의 극치를 보여주진 못하지만 링크스와의 이상적인 조합의 코스라 할 수 있다.

컷 통과는 실패했지만 한국의 차세대 주자다운 배짱을 보여줬던 이재경은 “더 배우고 오라는 계시 같았다”라고 간단명료한 소감을 밝혔다. 인내가 필요한 이 코스에서 잘 견뎌냈지만 컷을 통과하기에는 2타가 부족했다. 이재경은 “다시 치라고 하면 컷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리치 램지(스코틀랜드)가 트로피 핫산 2세의 새로운 주인공이 됐다. 최종일 3타를 줄인 램지는 10언더파로 우승을 차지하며 유러피언투어 통산 3승째를 올렸다. 지난해 3차례 준우승 징크스를 털어냈고, 2012년 2월 이후 3년 1개월 만에 정상에 섰다. 램지는 "2006년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과 프로 첫 우승이었던 남아공 오픈처럼 이번 대회 우승도 아주 특별하다. '왕의 정원'에서 우승은 앞으로 자식과 손자들에게까지도 영광의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램지는 로열 골프장에서의 마지막 우승자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기자는 6일간 이 코스를 돌면서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혼자만의 필드를 누볐다. 선택 받은 자만이 초대 받는 ‘꿈의 코스’지만 기자에게는 악몽이 될 게 뻔했기에 초대장을 거부할 것 같다.

로열 골프장은 1987년 세계적인 코스설계가인 로버트 트렌트 존스 시니어가 설계했다.


우승을 차지해 칸자르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리치 램지.

아가디르=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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