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세컨드샷-김시환의 미국 국적 취득
03.01 09:01

유러피언투어 대회 요보그 오픈 1라운드 중계를 보다 깜짝 놀랐다. 리더보드 상위권에 오른 김시환(27) 옆에 미국 성조기가 펄럭였기 때문이다. 방송사 실수인가 하고 알아봤더니 그의 아버지 김상배씨는 "지난해 4월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했다.
김시환은 지난해 유러피언투어에서 한국 선수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올해부터 미국인으로 나온다.
김시환은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가 1999년이다. 직전에 있었던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이 관계가 있을 거다. 김시환은 타이거 우즈와 데이비드 듀발 등이 우승했던 US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 2004년 우승자다.
타이거처럼 스탠퍼드 대학에 갔다. 미셸 위와 입학 동기다. 대학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다. 프로 전향 후 약간 슬럼프 기미를 보이며 지난해 말 유럽 챌린지 투어(2부 투어)로 물러섰지만 장타에, 재능도 뛰어나 조만간 정상권으로 돌아올 엘리트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시환의 미국 시민권 취득은 한국 남자 엘리트 골퍼의 엑소더스의 신호인지 모른다. 여론 때문에 국적 변경을 주저하는 선수가 있는데, 선례가 생겼으니 외국인이 되는 선수가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해외에서 활약하는 병역 미필 선수는 탁구스타 안재형-자오즈민 부부의 아들 안병훈(24)과 노승열(24), 정연진(25), 김시우(20) 등이다. 물론 배상문(29)도 그 중 하나다.
안재형씨는 “영주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시민권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체류하는 엘리트 골프 선수들 사이에 배상문 사태를 보고 미리 미리 준비하자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외국에 체류하고 있으면 징집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병역의무에서 빠져나갈 구멍도 크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활동 기간이 짧고 수입은 많은 운동선수라면 군대에 안 가는 방법을 고려해 볼 것이다.
박찬호나 박지성, 추신수 등은 대표팀 성적으로 군대에 안 갔는데 만약 면제 받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이행했을까. 야구 백차승이 미국 시민권을 딴 것처럼, 축구 박주영이 모나코 영주권을 취득한 것처럼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민가는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쿨하다.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보는 듯하다. 여자 골퍼 리디아 고가 뉴질랜드 국적으로 활동하는 데도 한국인은 별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 시민권을 딴 김시환이나 타국 국적 취득을 고려하고 있는 남자 선수들을 비난하기도 어렵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여자 선수는 외국국적을 따도 되고 남자 선수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미국 국적의 케빈 나(32)나 뉴질랜드 국적의 대니 리(25)처럼 일찌감치 해외 국적을 따는 것는 괜찮고, 한국 국적을 지키려다 20대 중반 뒤늦게 ‘전향’한 선수를 비난하기도 이상하다.
어디까지 되고 어디서부터 안 되는지의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다. 불투명한 안개 속같다. 병역 문제는 너무 민감해서 지뢰밭이기도 하다. 이처럼 매우 위험한 안개 속 지뢰밭에서 한국남자 골퍼들은 고뇌하고 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병무청의 해외 여행 허가 없이 미국에서 프로골퍼로 활동하고 있는 배상문을 옹호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안타까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배상문이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 투어에서 성장한 배상문이라면 한국인의 짐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래도 배상문이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한다면 기자 개인적으로는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수 유승준처럼 출입국 관리법에 따라 입국 거부가 되더라도 선수로서 자신의 길이 더 소중하고 21개월의 병역 기간을 손해볼 수는 없다고 생각되면 갈 수 있다.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인력 유출은 문제다. 프로 골퍼들은 실력이 좋을수록 외국 국적 따기가 용이하다. 병역에 부담을 가진 남자 골퍼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 고급 자원의 엑소더스가 생기면 골프의 심한 여고남저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병역 문제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아마추어만 출전할 수 있도록 규정된 시대착오적인 아시안게임 골프에 프로 참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일 게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